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레아스 쾨프케 (문단 편집) == 선수 경력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" [[파일:Andreas Köpkee.jpg|width=100%]]}}} || 상대적으로 뒤늦게 빛을 본 대기만성형의 선수로 1979년 [[홀슈타인 킬]]에서 처음 선수 생활을 시작해 1990년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승선하기까지 무려 11년이 걸렸다. 독일이 통산 세번째 우승을 차지한 [[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|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]]에도 당당히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 시기 독일의 주전 수문장은 [[보도 일그너]]였기에 서브 골키퍼로의 역할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.[* 그가 젊은시절인 1980년대는 선배인 [[토니 슈마허]]가 있었고 슈마허의 은퇴 후 일그너와 경쟁하게 되었는데 분데스리가에서의 위상은 쾨프케가 일그너 보다 좀더 높았지만 당시 베켄바워 감독의 전술상으로 장신의 일그너가 주전 골키퍼로 더 적합하다 판단했고 토너먼트 특성상 승부차기 까지 대비하는 상황까지 올수있기에 장신키퍼가 유리한점을 고려해서 실력보다는 전술상으로 쾨프케가 주전이 되지 못한 불운이었다.] 1993년 독일 올해의 선수로 선정될만큼 훌륭한 실력을 소속 클럽에서는 선보였지만, [[UEFA 유로 1992]]와 [[1994 FIFA 월드컵 미국|1994년 미국 월드컵]]에서도 주전은 변함없이 일그너였고,[* 베켄바워 감독 시절에도 전술상으로 쾨프케가 주전이 되지 못했지만 당시 수석코치였던 포그츠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바뀌어도 월드컵 우승 주전 골키퍼를 교체할 명분이 없었고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 까지 대비해야하는 상황에서 장신인 일그너가 더 적합하다는 점에서는 포그츠 감독도 같은 생각이었다. 게다가 94 미국 월드컵 전까지 일그너의 폼도 쾨프케 못지않게 이때까지는 좋았다.] 게다가 일그너가 그보다 무려 5살이나 젊었기에 국가대표에서는 평생 후보로 만족해야 할 것처럼 보였지만 1994년 월드컵 8강에서의 충격적인 탈락 이후 일그너가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에게 드디어 서광이 빛추기 시작했다. 처음으로 주전 자리를 차지한 [[UEFA 유로 1996]]에서 눈부신 선방을 보여주면서[* 특히나 잉글랜드와의 4강 경기에서 경기 내내 일방적으로 잉글랜드에게 밀렸지만 안정적으로 골문을 지킨데 이어 승부차기에서 [[가레스 사우스게이트]]의 슛을 막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.] 독일의 우승을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1996년 유럽 올해의 골키퍼 상을 수상하기도 한다. 그렇지만 이 시기에 이미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]]은 서서히 침체기로 빠져들고 있었고 [[1998 FIFA 월드컵 프랑스|1998년 프랑스 월드컵]]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3-0으로 참패를 당한 직후 국가대표의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. [[파일:external/lh6.googleusercontent.com/bc9d3a746f1a.jpg|width=650]] ▲1998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선발 라인업([[위르겐 콜러|콜러]], 하만, 타르나트, 하인리히, [[올리버 비어호프|비어호프]], 뵈른스, [[로타어 마테우스|마테우스]], [[토마스 헤슬러|헤슬러]], 예레미스, [[위르겐 클린스만|클린스만]](주장), 쾨프케) [[1998 FIFA 월드컵 프랑스|1998년 프랑스 월드컵]]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의 핵인 [[리베로]] [[마티아스 자머|자머]]가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만37세의 노장 [[로타어 마테우스|마테우스]]의 대표팀 승선이 결정되었다. 16강에서 멕시코에 2:1 승리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8강에 올라왔으나, 8강에서 독일은 [[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|크로아티아]]에 0:3으로 완패당했다. [youtube(TRaOd4pfKcw)] 이 경기에서 전반 막판에 뵈른스가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역적질을 저지르며 독일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며 무너지기 시작한게 컸지만, 이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는 딱딱하고 투박한 독일식 축구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잘 알고 있음을 증명했다.[* 이미 2년전 유로 96 8강에서 양팀이 당시나 이때나 비슷한 멤버로 경기를 해봤고 비록 당시는 크로아티아가 2-1로 패배했지만 독일에대한 공략법을 이당시 선수들이 어느정도 습득한셈이다.] 그리하여 독일은 크로아티아 특유의 독일 약점 공략전술과 [[다보르 슈케르]], 크로아티아의 [[LTE]]급 역습에 그대로 털려 결국 [[KO]]되고 말았다. 이때 당시 크로아티아는 조별리그에서 최고 허접 자메이카에게도 패한 일본을 상대로 하마터면 비길 뻔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고는 해도 '''처녀 출전국치고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최대 돌풍팀이었다'''. 이 경기 이후 당시의 크로아티아에게 당한 충격은 [[독일인]]들에게 거의 종말, 나라 잃은 슬픔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. [[1998 FIFA 월드컵 프랑스|1998년 프랑스 월드컵]]에서 독일은 [[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|크로아티아]]전 패배로 8강에서 탈락한 이후 독일축구는 약 6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. 또 94년 월드컵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패한 데 이어 [[1998년]]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패배한 이후 독일은 한동안 [[동유럽]] 징크스, 동유럽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. 또 여전히 고전적인 3백을 고집해 현대 전술사의 흐름에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. [[UEFA 유로 1996]]때와는 다르게 [[1998 FIFA 월드컵 프랑스|1998 프랑스 월드컵]]에서는 예선전 유고슬라비아전에서 알까기로 실점을 허용하는 듯 다소 각 떨어진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[[마티아스 자머]]가 부상으로 빠진 녹슨 수비진이 더 문제였고, 크로아티아전은 크리스티안 뵈른스의 퇴장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. 그리고 실점한 중거리포들도 너무 말도안되게 바운드까지 먹어서 구석으로 가는 역사적인 럭키슛들이었고 아마 당시 잘나가던 [[호르헤 캄포스]], [[파비앵 바르테즈]], [[에드빈 판데르사르]], [[김병지]]도 어쩔 수 없이 먹혔을만한 상황이지만 3실점 탈락이라는 멍에를 혼자 다 뒤집어쓰고 말았다. 당시 경기 중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골대를 후려치던 모습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. [* 사실 3골이나 먹히긴 했지만 쾨프케가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. 뵈른스가 백태클로 한 큐에 레드카드를 먹고 퇴장당한 수적열세의 상황에서 야르니와 블라오비치의 대각선 중거리 슈팅도 도무지 막을 수 없는 구석으로 꽂혀들어가기도 했고...] 그리고 그 결과로 쾨프케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에서 거의 10년 동안 벤치만 달구던 [[올리버 칸|한 맺힌 굇수]]이 수문장으로 등장하는데... 한편 클럽 커리어 상으로는 대부분의 시기를 [[1. FC 뉘른베르크]]에서 보낸 뉘른베르크의 레전드 출신이다. 덕분에 나중에 뉘른베르크의 홍보 담당 대사를 맡기도... 뉘른베르크 외에도 [[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]]와 [[올랭피크 드 마르세유]]에서 전성기의 한 자락을 보냈으며 2001년을 끝으로 선수에서 은퇴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